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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티아고순례길] Day35. 아르수아에서 라바코야까지. 귀족 저택을 개조한 고급숙소 파소산소르도(Pazo Xan Xordo)에서 하루밤.
    스페인 2024. 9. 30. 01:19

    아르수아 (Arzua) -> 라바코야 (Labacolla). 약 32km.

    전날 비를 맞으며 하루종일 걸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쑤시고 몸살기가 느껴졌다. 산티아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해 보니, 약 40  km가 남아있었다. 

    산티아고에서 며칠간 여유있게 머무르며, 무사히 도착한 감회도 충분히 즐기고 난 후 프랑스로 넘어가고 싶었다. 즉, 산티아고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날은 많이 걸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오늘 혹시 무리하면 오늘 도착.., 오늘 다 못 걸으면 내일이라도 내 몸이 드디어 산티아고에 있을 것!!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어쨌든,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많이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다소 객기 어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조 산(Monte del Gozo) 넘어 오늘 산티아고 초입 근처까지 갈수 있으면 가보자~! 하고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나의 객기였음이 금방 드러났다. 11월 중순을 넘어 말일로 가까워지고 있어서 날씨는 너무 춥고 (스페인 서북부 아스투리아스 지역은 한국과 비슷한 날씨로 숲과 나무가 많고, 사계절이 있고 춥다), 밖에서 걷기 시작한 지 삼십 분만 지나도 찬바람 맞으며 걸어야 하니 피곤함을 더 빨리 느끼고 더 쉽게 지쳤다. 

    그런 탓에 무리해가며 걷지 말자로 급하게 노선 변경~! 몸이 피곤해서인지, 완연한 늦가을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전날과는 다르게 이날은 경치도 그냥 그렇고, 무엇보다 조금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사진도 안 찍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 30 km쯤 걸었을까, 라바코야 마을에 가까워지자 몸이 안 움직여질 정도로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이상 못걷겠다 스탑~!! 라바코야에 숙소가 있나 알아봤더니, 파소 산 소르도(Pazo San Xordo)라는 이름의 17세기 대저택을 복원한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숙소가 있다길래, 이날은 오래 길게 걸었으니 산티아고 도착 전 힘내라는 의미(?)로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하고 부킹닷컴으로 예약을 한 후 그곳으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이미 저녁 일곱시 경이었다. 스페인 특유의 돌과 나무로 지은 저택 숙소였다. 문도 매우 크고, 마당이 넓고 밖에선 안이 아예 안 보이도록 담장이 높았다. 마을 어디선가 멀리서 큰 개들이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 유럽 명화에 그려져 있는 스페인 사람 특유의 얼굴로 생긴,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얼굴의 남주인분 (or 남관리인?)이 정중히 반겨주었다. 거실 한쪽 벽에는 대형 순례길 지도가 걸려있었다. 내가 이걸 거의 다 걷다니. 

    남주인은 키가 크고 다소 마르고, 얼굴은 뾰족하고,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었는데..... 음....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유심히 생각하다 앗~ 머릿속에 떠오른 캐릭터가 가제트 or 가가멜이었다. 만화 캐릭터가 튀어나와서 현실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페인 특유의 중후한 느낌이 드는 인테리어로 숙소가 꾸며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비수기여서 그런듯, 이날 머무르는 손님은 나 하나인듯했다. 나와 주인장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마치 깊은 산속마냥 숙소에는 적막만 가득했다.

    나도 그렇고 주인분도 별로 말수는 많지 않은 편인 거 같아서 짧은 대화 후에 이어지는 침묵에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피곤한데 억지로 텐션올려 말할 필요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할까?

    패브릭 소파들과, 원목 가구들 등으로 꾸며진 스페인 전통 고택 분위기의 거실. 

    주인분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 거실을 지나 좁은 복도 문을 두 개 정도 지나자 예약한 방이 나왔다. 방 안에는 옛날 유럽 귀족들이 쓰는 양 네 귀퉁이에 기둥이 있고, 붉은 벨벳 커튼이 달려있는 중세 스타일의 캐노피 침대가 있었다. 거기에 방 한쪽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형 욕조가 딸린 프라이빗 화장실이 나왔다. 

    방 안내를 마친 뒤 저녁은 언제 먹을 것인지 주인분이 물어봐서 아홉시에 먹겠다고 말했다. 주인장분은 알았다고 한 뒤, 문을 조용히 닫고 편히 쉬라며 나갔다. 왠지 내가 중세 배경의 게임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짐을 풀고 뜨거운 물을 받아 욕조에서 피곤을 풀고 나와서 침대에 누워 순례길 여행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찰나에,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주인분이 저녁이 다 되었으니 나와서 먹으라고 안내를 하였다. 주인분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복도가 미로처럼 되어있어 안내가 없으면 헷갈리기 십상.

    나가보니 거실 정 중앙 테이블에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주인분이 의자를 가볍게 빼주었고, 나는 그에 맞춰 자연스레 앉았다. 거실 정중앙에 앉아 혼자 접객 서비스받으면서 식사하려니 정말 뻘쭘 그 자체.

    그래! 난 대접받을 권리가 있어! 이곳은 고급 숙소야. 이런 서비스에 뻘쭘해하면 안 돼! 여기 분위기에 맞춰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행동해!라고 마인드 컨트롤 하면서 자연스러운 척했다. 하하 ^^;; 

    전채는 가벼운 느낌의 피데우아 수프와 빵. 피데우아 스프는 가벼워서 밤늦게 먹어도 속에 무리가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저녁에 자주 먹는 스프 메뉴 중 하나다. 

    저녁은 역시나 소고기에 감자튀김... 조금 뻔한 순례길 전용 메뉴였지만... 물리지 않고 먹을 때마다 맛있다. 스페인에서 감자튀김과 소고기 찹스테이크는 사랑입니다~

    후식은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요구르트와 과일이 나왔다. 거실 정중앙에서 1대 1 주인분 웨이터 서비스 받으며 조금 많이 뻘쭘했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 감사합니다. 

    식사를 다 하고 난 뒤 사진 찍으며 거실을 천천히 구경했다. 아기 천사 모양의 청동 부조가 달린 아주 예쁜 거울~

    거실 창문 쪽 한편에 놓인 중세 느낌 의자들. 이 의자를 딱 보자, 아 중세느낌(?) 귀족 의자다 하는 게 느껴져서 사진을 찍었다. 아름답고 중후하다. 등받이가 높고 꼳꼳한데 아주 높은 것까지는 아닌 걸로 보아 왕족 의자는 아니고 귀족의자이고, 의자 기둥이 부드럽게 굴곡이 들어가 있고 다리 중간 이음새가 견고하며 장식적 요소가 적절히 아름답게 들어 있다. 

    아 저 의자 다리 기둥의 모양과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섬세한 두께, 손잡이 부분의 미세한 굴곡이 주는 우아함, 등받이와 헤드 부분의 금박 꽃잎 문양 조각으로 느껴지는 기품(??). 

    거실에 놓인 의자, 서랍장, 책장, 테이블 등등을 구경하면서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중세 & 르네상스 & 벨 에포크 등 시대별로 의자랑 서랍장 미술품 등 수집하면 좋겠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한국에서 유행 중인 북유럽, 바우하우스, 미드센츄리 같은 미니멀 느낌도 멋지지만, 개인적으로는 공예 기술이 한껏 들어가 있는 스페인이나 프랑스 궁전 및 저택에 가면 볼 수 있는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스타일의 느낌이 너무 좋다. 그리고 그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건 감각적이고 세련된 르네상스도 좋지만, 범접할 수 없는 중후함이 묻어 나오는 중세 스타일이 마이 페이보릿.. ! 

    만약 내가 예술 분야를 전공으로 택해서 학예사로 근무했다면, 이런 서양 전통 건축& 미술 공예 등을 공부하고 수집가로 살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 이후로 아름다운 건축물, 가구, 그릇, 조명, 그림 등을 보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거실에서 가구랑, 그림 등을 구경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고조 산을 지나서 드디어 산티아고에 진입한다. 걸어도 걸어도 몇백 킬로나 남아 끝이 없을 것 같더니 하루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라는 것이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내일이면 산티아고 성당!! 거기에다가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라도르 국영 호텔에 방을 미리 예약해 놓아서, 호텔 안에 있는 각종 스페인 예술품 및 가구들을 구경할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었다.

    어서 내일이 오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는데, 방이 생각보다 너무 넓어 소리가 울리는 데다, 호텔에 나 혼자 손님(??)이라 완전 적막만 가득하다 보니 생각보다 신경이 곤두서서 잠이 안 와 뒤척거리다 겨우 잠에 들었다.

    예산 여유가 있고, 예술품이나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스페인에서 꼭 전통 귀족 저택을 개조한 호텔 숙소나 파라도르 국영 호텔 등 고급 숙소에 머물러 보시기를 권유하고 싶다 !

    다음날이면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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