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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티아고 순례길] Day 1. 프랑스 생장피에드포에서 스페인 론세스바예스로, 피레녜 산맥 넘어가기
    스페인 2020. 12. 30. 18:55

    새벽부터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서 피곤이 안 풀린 것 같다. 휴대전화를 보니 아직 새벽 6시경. 10월 가을이라 이제 해가 점점 늦게 뜨기 때문에 밖은 아직 한참 어둡고 컴컴한데, 알베르게 숙소 사람들 반절 이상은 벌써 떠난 것 같다. 부지런하다.

    나는 여유롭게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하긴 오늘은 27km나 걸어야 하고 피레녜 산맥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나도 어서 움직여야 될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2층 침대에서 겨우 쭈그리고 머리에 헤드렌턴을 뒤집어 쓰고, 조그마한 헤드랜턴 불에 의존해서 가방을 주섬주섬 싸고, 침낭을 구겨 넣고, 오늘 먹으려고 어제 까르푸 슈퍼마켓에서 산 음식들도 챙기고 하다 보니 짐이 벌써 한 보따리다. 10kg은 족히 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름 순례길에는 옷도 가볍고 침낭도 가벼운데, 가을 순례길이다 보니 옷도, 양말도, 침낭도 다 무거워서 그냥 기본적인 것만 챙겼는데도 10kg이 훌쩍 넘는다. 음식까지 챙기니 한 13kg은 되는 것 같다. 어깨가 천근만근 무겁다. 가방 메다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알베르게에서 커피랑 식빵 같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차려주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없고, 재료도 다 떨어졌는데 채워주지도 않아서 그냥 나서기로 했다. 아직 바깥이 칠흙같이 어둡다. 가로등 등불 아래만 밝다. 

    숙소 밖으로 나왔는데 아무도 없다. 어디로 가야하지?

    숙소 앞 바깥으로 나오니 아무도 없어서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같이 걷는 일행 없이 혼자 왔기 때문에 멘붕이 잠시 왔다. 어디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바닥에는 조가비 표시도 없고 화살표도 안 보인다. 

    다행히 어제 순례자 사무소에서 준 지도에 마을 지도가 같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마을 지도에 어디로 빠져나가라는 표시가 되어있던 게 기억나서 그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숙소 앞 길로 쭉 내려가서 어제 구경했던 강물 위 다리를 지나면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휴 다행이었다. 첫날 아침부터 멘붕이 올 뻔했다. 

    어두운 마을 길에 혼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우두커니 서있으니 그제야 내가 진짜로 길을 걷는다는 실감이 났다. 어제는 숙소에 짐도 풀었고, 구경 다녔기 때문에 아무런 긴장감이 안 들었었는데, 오늘 새벽에서야 긴장감이 들었다. 

    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오니, 더욱 더 어둡다. 헤드랜턴을 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해는 7시 넘어야 뜰 텐데. 뚜벅뚜벅 걷다 보니, 저 앞에 한 두 명씩 걸어가는 다른 순례객들의 불빛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다른 순례객의 불빛을 보니 안심이 되고 마음이 한결 놓였다. 

    길을 걷다보니 표지판이 하나 나왔다. 드디어 처음 보는 조가비 표지판이다. 운토 마을까지 4.6km, 그다음 오리송 알베르게 까지는 7km 약 두 시간 남았고. 꼴 드 벤따흐뜨 까지는 15.8km 아마 산 정상쯤인가 보다. 그다음이 목적지 론세스 바예스로 24.3km이다.

    저 표지판에는 걸어서 6시간 35분으로 되어있는데 나는 12시간 가까이 걸렸다. 물론 내가 뭉그적 뭉그적 천천히 걸은 것도 있고,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한참 뒤처진 것도 있고, 체력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도 이유인 것 같다.  

    길을 걷다보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엄청 헷갈리게 되어있다. 이제 7시가 넘어서 해가 뜬것 같은데, 안개가 낀 것인지 길이 아직 어슴푸레하다. 다행히 바닥에 노란색 화살표 표시가 있어서 그 길로 갈 수 있었다. 노란색 화살표 표시가 너무 고마웠다. 

    여덟 시가 넘어가니 한결 환해졌다. 돼지를 키우는 것 같은 농가를 옆으로 두고 엄청난 오르막이 시작되었는데, 그 오르막을 올라가니 중턱 즈음에도 운토 레퓨지가 있었다. 힘든 사람들은 잠깐 여기서 쉬어갈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나는 갈길이 바빠서 그냥 지나갔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여기서 하루 쉬고 가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았다. 

    공사중인 오리송 알베르게

     더 걸어가니 오리송 알베르게가 나왔는데, 공사 중이었다. (몇년전이니 지금은 공사를 마쳤을 것이다.) 오리송 알베르게에서 쉬어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이용할 수 없다. 그냥 지나쳤다. 

    오리송 알베르게를 지나니 진짜로 피레녜 산길이 시작되었다. 조금 걸어가니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길에서 쉬고 있었다. 사람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 이렇게 동물들이 내 눈앞에 짠 하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너무 신기했다. 

    피레네 산길이 본격적으로 보인다. 오르막 내리막이 왔다갔다 나온다.

    피레네 산길이 나온다. 이 길로 차들도 간간히 지나다닌다. 동키 서비스 차들도 지나다니고 마을 사람들 차들도 지나다닌다. 하지만 매우 한적하고 차들이 천천히 지나다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적한 피레네 산맥이 정말 아름다웠다. 

    귀여웠지만 시크한 성격이었던 보더콜리. 내 옆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오르막 중턱 쯤에서 보더콜리 한마리를 만났다. 매우 귀엽게 생겼다. 주인은 어디 있는지 안보였다. 이 보더콜리는 하도 사람들이 이뻐라 해서 그런가 약간 시크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 지겨웠나 보다. 그래도 내 옆에 와서 얌전히 앉아있었다.

    12시경쯤이어서 배가 고파, 여기 잔디밭에 앉아서 어제 슈퍼마켓에서 샀던 샐러드랑 샌드위치로 점심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노란색 화살표 표시석. 갈림길마다 이렇게 노란색 화살표나 조가비가 그려진 표시석이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점심 먹으며 생각해보니 10kg이 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는 다는걸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몸무게가 대략 40kg 후반대이니, 거의 내 몸무게의 1/5이 넘는 것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것이다.

    점심 먹으며 가방을 내려놓으니 살 것 같았다. 다시 메려고 가방을 쳐다보니 메기가 싫다...

    한참 동안이나 보더콜리랑 놀면서 농땡이를 부리는 동안, 길 옆으로는 다른 순례객들이 독일 병정마냥 앞만 보고 척척 걸어가며 지나갔다. 다들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덧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론세스바예스에 적어도 6시-7시 전에는 도착해야 할 텐데...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귀여운 보더콜리와 인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보더콜리와 헤어진 후 오르막을 올라가니 이번에는 점박이 무늬 돼지들이 나타났다.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점박이 무늬가 참 독특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와있는 기분이다. 

    피레네 산맥에는 이렇게 산비탈에 동물들을 풀어놓고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도록 하고 있었다. 동물들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피레네 산맥에 있는 말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말보다 더 크기가 작고 말발굽이 두껍고, 하체가 튼실해 보였다. 제주도에서 키우는 말과 품종이 비슷해 보였다. 여기도 옛날에 몽골족이 왔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산비탈에 양들이 끝없이 있다. 산비탈이 높아서 가까이 갈 수 없고, 멀리서만 지켜보았다. 양들 목에 걸려있는 종소리만 바람에 실려 간간히 들렸다. 햇빛이 없고, 안개 속에 양들이 쭈욱 누워있으니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산 정상쯤에 다다르니 피난처 같은 곳이 나왔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른 순례객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나도 여기서 조금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같이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안개가 자욱이 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이렇게 누워서 다들 쉬고 있었다. 

    이 순례객 친구는 아일랜드에서 왔는데, 나중에 길에서 이 친구 일행과 만나서, 이틀 정도 같이 걷게 되었다. 아주 쾌활하고 활달하고 마음씨도 넓은 친구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어를 할 때 억양이나 톤이 마치 노래 부르는 것처럼 말을 해서 너무 재미있었다. 

    갑자기 햇빛이 나면서 안개가 싸악 걷혔다. 너무 신기했다. 순식간이었다. 그러자 피레네 산맥 줄기가 먼 곳까지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갈 때가 무릎에 무리가 가서 더 조심해야 했다. 

    햇볕 아래서 본 피레네 산맥은 참 아름다웠다. 너무 높지도 않고 완만한 경사가 계속해서 구불구불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당나귀도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당나귀를 본 건 처음이었다. 당나귀는 사람을 조금 경계하는 듯 했는데, 바게트 빵조가리를 주니까 가까이 다가와서 빵 조각만 먹고 금방 또 옆으로 가버렸다. 너무 귀여웠다. 

    말과 양이 산비탈에 엄청 많다. 

    사진찍으며 내려가다 보니, 벌써 해가 약간 노을이 지려고 폼 잡는 것 같았다. 벌써 세시 반이었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아뿔싸.. 사람들이 그렇게 서둘러서 갔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적응이 안되어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속도보다 한 절반 이상은 느린 것 같았다. 

    이때부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해서 엄청 빨리 걷기 시작했는데, 점점 무리가 왔다. 다섯시까지는 그래도 해가 떠있었는데 다섯 시 반쯤부터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폼을 잡았다.

    아직 산속이었는데... 이대로 갑자기 해가 져버리면 어떡하지?? 이차 멘붕이 왔다. 론세스바예스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마음이 더더욱 조급해져서 거의 달리다시피 산속을 걸었던 것 같다. 마지막 5km가 정말 힘들었다. 

    여섯 시가 되니 이제 어둑어둑 해졌는데 아직 알베르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제 내리막이 아니고 평지였다. 저 멀리 바라보니 마을이 보이는 것 같았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는 일곱 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여덟 시가 넘으면 순례객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저녁 시간도 놓칠 뻔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약간 산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 중심 하고는 거리가 조금 있는 듯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정말 규모가 컸고 자원봉사자들도 많았다. 특이한 것은 네덜란드 봉사자들이 많았고, 할머니 할아버지 봉사자들이 많았다. 정말 알베르게 문턱을 넘자 마자 숙소 배정을 받기도 전에 사무실 앞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산해보니 점심시간 빼고 거의 12시간을 걸었다. 미쳤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그렇게 뻗어있다가 그래도 정신 차리고 뻗더라도 침대에서 뻗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일단 숙소를 배정받은 다음, 침대에 그냥 누워버렸다. 원래는 씻고 나서 누워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저녁을 못먹고 자면 다음날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일단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8시 타임 쿠폰을 사서 식당으로 갔다. 다행히 나같이 늦게 도착한 순례객들이 꽤 있어서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저녁을 먹으러 온 순례객들이 많았다.

    내가 유일한 동양인 순례객이었고, 그다음이 체코에서 온 부부 순례객, 프랑스 순례객, 스페인 순례객들이었다. 같이 앉아서 저녁을 먹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이 저녁식사였던 듯하다.

    배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식사가 꽤 맛있었다. 식당 분위기도 깨끗하고 정갈하고 좋았다. 스페인 여행할 때마다 느낀 점인데 스페인 음식이 한국 사람들 입맛에 잘 맞는 편인 것 같다. 특히 고기랑 감자요리가 맛있다. 하얀 식탁보가 예쁘게 깔려있고, 어두운 고동색 나무 무늬의 투박한 식탁과 단순하지만 고풍스런 느낌의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다들 아시아에서 혼자 온 나한테 간간히 말을 걸었다. 다행히 내가 스페인어를 아주 조금 말할 수 있어서 그럭저럭 아주 간단한 의사소통이 되어 나름 대화 분위기가 좋았다.

    언어라는 것이 통해야 서로 친근감도 느끼고 소통이 되는 것이 참 신기하다. 언어가 안 통하면 대화도 안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해서 어색하고 답답한 경우가 많은데, 역시 언어는 참 중요하다. 

    30대로 보이는 체코 부부가 옆에 앉았었는데, 다정하게 말도 걸어주고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체코에 놀러오면 자기들한테 꼭 연락하라고 이메일 주소도 알려주었는데, 정확히 일 년 후에 체코에 놀러 갔는데 연락할까 하다 연락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냥 말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나니 벌써 9시 반이 넘었다. 대충 씻고 나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버렸다. 내일 아침에 8시에 나가려면 얼른 자야한다.. 그래서 빨리 누워 잠을 청했다. 다른 침대에 있는 순례객들과 다정하게 말할 시간도 없었다.

    침대에 간신히 눕고나니 정말 온몸이 욱신 욱신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내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일 과연 10kg이 넘는 저 가방을 다시 멜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단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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